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른스트 룀 (문단 편집) == 나치당 내 분파 갈등 ==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고,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헤르만 괴링]]이 기존에 자신들을 탄압하던 주 경찰 간부들을 해임하고 이 자리에 돌격대 간부들을 임명하면서 SA는 법적으로 경찰에 준하는 지위에 올랐다. 나치가 힘을 얻은 만큼 SA도 기고만장해져, 지방 관청에 들이닥쳐 행정을 나치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룀과 돌격대는 이제까지 해 오던 대로 독일을 더 크게 변화시킬 작정을 하고 있었지만, 히틀러는 룀의 생각대로 독일을 바꿀 마음이 없었을 뿐더러 돌격대를 쓸데없어진 사냥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룀의 사상에 있었다. 그는 나치당의 사회주의 분파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었으며, '''사회주의적인'''(Sozialistische), '''노동자'''(Arbeiter) 등 [[사회주의]]적인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이 분파의 성향은 대체로 [[유대인]]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 지배를 선호했다. 특히 제2제국 시대부터 내려오는 귀족들의 자산을 몰수하여 재분배하기를 원했고, 룀은 '''반동세력'''에 맞선 '''제2의 혁명'''을 주구장창 부르짖었다. 히틀러의 집권을 도운 자본가 세력은 이를 큰 위협으로 여겼다. 히틀러는 자본가들에게 '''제2의 혁명은 없다'''라고 말하며 안심시키려 했지만, 돌격대의 출신 성분을 바꿀 순 없었다. 상당수가 노동계급 출신인데다 전직 공산주의자가 득실거리는 이들은 '''스테이크'''[* 겉보기에는 나치당의 상징색처럼 갈색이지만, 그 속은 공산주의자와 같이 붉은색.]와 같았다. 결국 권력을 잡은 히틀러가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시행하지 않고,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 SA에게도 보답하지 않자 이들은 곧 실망하였다. 심지어 룀은 돌격대 지도자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히틀러의 정책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이때 룀이 히틀러를 공개비판했다고 밀고한 빅토르 루체는 장검의 밤 이후 돌격대 참모장이 되는 것으로 보답받았다.] 더더욱 위험한 것은 [[독일군|국군]](Reichswehr)을 바라보는 300만 SA의 시선이었다. 룀과 SA 수뇌부는 구 [[프로이센]] 귀족들이 주름잡는 국군을 아주 싫어했으며, '''혁명정신이 떨어지고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취급했다. 때문에 룀은 국방장관이 되고, 군대를 SA에 합병하여 '''진짜배기 인민군'''을 창설하고 기존의 국군에는 기껏해야 신병의 소집과 훈련 정도의 역할만 남겨두려 했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군조직 관념은 19세기 독일내 진보진영이 이상시하던 민병대의 관념을 받아들인 것이며, 무장친위대 또한 이러한 사상적 영향 아래에서 형성될 수 있었다.] 당시 돌격대는 5개의 돌격대 상급집단(군단에 해당)과 18개의 돌격대 집단(사단에 해당)으로 구성되어 정규군의 5배에 달했고, 지휘관들도 전직 군인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하려고 하면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의 깊은 역사를 가진 국군 수뇌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거리에서 쌈박질만 해대며 수뇌부라는 자들은 동성애나 저지르는[* 후술하겠지만 에른스트 룀은 동성애자였고 놀랍게도 자신의 성적 지향을 감추지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술.] 오합지졸'''들 따위에게 국군을 들어다 바칠 의사 또한 전혀 없었다. 때문에 군과 SA의 갈등은 깊어져 갔으며, 히틀러도 물론 국군 수뇌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권력의 안정화를 위해 군부를 휘어잡을 필요를 느꼈기에 룀의 노선과는 갈라서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